- 0
- 타이쿤
- 조회 수 0
1. 정교분리에 대한 위험한 오해
"정교분리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종교인은 정치에 관여하지 마세요."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그러나 이는 정교분리(政教分離) 원칙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다.
정교분리는 종교가 정치에 간여하지 말라는 원칙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정치권력이 종교에 간섭하지 말라는 원칙이다.
이 오해는 단순한 개념 착오를 넘어, 민주주의 사회에서 종교인과 종교단체의 정당한 정치 참여를 제한하는 도구로 악용되어 왔다.
2. 역사가 증언하는 원칙의 탄생
정교분리 원칙은 왜 탄생했는가? 유럽의 역사를 돌아보면 답은 명확하다.
중세와 근대 초기, 국가권력은 종교를 통제하고 이용했다.
영국 국교회의 탄생이 대표적이다. 헨리 8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교회를 국가 아래 두었고, 이후 수백 년간 비국교도들은 박해받았다.
프랑스에서는 위그노(신교도)들이 학살당했고, 독일에서는 "누구의 땅이냐에 따라 그 땅의 종교가 결정된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칙이 지배했다.
존 로크(John Locke)는 《관용에 관한 편지》(A Letter Concerning Toleration, 1689)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국가의 권력은 시민의 외적이고 세속적인 이익에만 관계된다. 영혼의 구원과 관련된 일에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관계할 수도 없다."
3. 미국 수정헌법 제1조의 진정한 의미
1791년 비준된 미국 수정헌법 제1조는 이렇게 명시한다:
"의회는 국교를 정하거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 (Congress shall make no law respecting an establishment of religion, or prohibiting the free exercise thereof)
주목할 점은 이 조항이 정부를 제한한다는 것이다.
종교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 국가는 특정 종교를 국교로 정할 수 없다 (Establishment Clause)
- 국가는 종교의 자유로운 활동을 방해할 수 없다 (Free Exercise Clause)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1802년 댄버리 침례교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회와 국가 사이의 분리 장벽(wall of separation between church and state)"을 언급했다.
그러나 그가 말한 '장벽'은 국가권력이 종교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는 방벽이었지, 종교인의 정치 참여를 막는 장벽이 아니었다.
4. 신앙인의 정치 참여는 권리이자 의무
성경은 신앙인의 사회적 책임을 명확히 한다.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마태복음 22:21)
이는 정치와 신앙의 영역을 구분하되, 둘 다 충실히 이행하라는 의미다. 정치 참여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는 《신국론》(De Civitate Dei)에서 그리스도인이 지상 국가의 시민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함을 강조했다. 영원한 신국(神國)을 소망하되, 지상 국가(地上國)에서의 의무를 저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5. 역사 속 신앙인들의 정치 참여
역사는 신앙에 기반한 정치 참여가 얼마나 위대한 변화를 이끌었는지 보여준다: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복음주의 신앙을 바탕으로 영국 의회에서 노예무역 폐지를 이끌었다.
그는 "신은 내게 두 가지 위대한 목표를 주셨다. 노예무역의 폐지와 사회 풍속의 개혁이다"라고 말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는 목사로서 흑인 민권운동을 이끌었다.
그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은 성경적 정의관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독일 교회가 나치에 순응할 때, 신앙인으로서 정치적 저항을 선택했다.
그는 "악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악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외쳤다.
6. 왜곡된 정교분리의 위험성
정교분리를 "종교의 정치 불참여"로 왜곡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첫째, 도덕적 진공 상태가 발생한다. 정치에서 종교적·도덕적 가치가 배제되면, 권력과 이익만이 정치를 지배하게 된다.
둘째, 기본권의 침해가 정당화된다. 종교인과 종교단체의 정치 참여권은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다. 이를 제한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후퇴다.
셋째, 위선적 이중 잣대가 만연한다. 특정 종교의 정치 참여는 비난하면서, 무신론적 세속주의의 정치 개입은 용인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7. 올바른 정교분리의 의미
진정한 정교분리는 다음을 의미한다:
국가는:
- 특정 종교를 국교로 정할 수 없다
- 종교 활동을 강제하거나 금지할 수 없다
-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차별할 수 없다
종교는:
- 국가권력을 장악하거나 통제하려 해선 안 된다
- 그러나 도덕적 목소리를 내고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 정의와 진리를 위해 불의한 권력에 맞설 의무가 있다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은 말했다:
"양심은 다수의 권위나 정부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다. 양심은 신 외에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8. 결론: 자유를 지키는 원칙
정교분리 원칙은 종교를 정치로부터 격리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국가권력의 전횡으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보호하고, 동시에 종교가 국가권력을 사유화하는 것을 막는 이중의 안전장치다.
역사는 국가가 종교를 통제할 때 어떤 비극이 벌어졌는지 보여준다.
또한 종교가 국가권력을 장악했을 때의 부패도 보여준다. 정교분리는 이 둘의 건강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지혜다.
종교인은 시민으로서, 유권자로서, 양심을 가진 존재로서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아니, 의무가 있다.
다만 그것은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함이 아니라, 정의와 진리를 위해, 약자와 소외된 자를 위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함이어야 한다.
정교분리는 종교의 입을 막는 재갈이 아니다. 국가권력의 손을 묶는 사슬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