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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칼럼] 성인(聖人)의 추락: 주희, “개처럼 기어서라도 살려달라” 목숨을 구걸하다

 

심계조의 강력한 ‘십죄(十罪)’ 탄핵 직후, 주희는 평소 당당하던 기개를 버리고 즉각 조정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학문적 신념을 부정함은 물론, 스스로를 극도로 비하하는 표현을 사용하여 처벌을 면하려 했습니다. 후대의 학자들은 이를 두고 정치적 책략이라 평하기도 하지만, 그가 직접 쓴 문장 속에 담긴 비굴함은 세간의 손가락질을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 주희의 사죄문: 굴욕적인 자기비하와 생존의 몸부림

 

주희는 상소문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1. 스스로를 ‘개와 말’에 비유하여 목숨을 구걸함

[원문] "伏乞慈光, 察其微忱, 哀其老病, 許其自新, 終獲犬馬之命."

[한글 번역] "엎드려 바라오니 자비로운 빛으로 저의 작은 정성을 살피시고, 늙고 병든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스스로 새로워질 기회를 허락해 주신다면, 끝내 개나 말과 같은 목숨(犬馬之命)이라도 부지하게 해주옵소서."

  • 해설: ‘견마지명(犬馬之命)’은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을 다짐할 때 쓰는 관용구이기도 하지만, 탄핵 직후의 맥락에서는 "개처럼 기어서라도 살려만 달라"는 처절한 생존 의지로 읽힙니다.

 

2. 자신의 학문을 '가짜'라 인정하고 뉘우침

[원문] "狂妄之罪, 固不容誅; 僞學之傳, 實自其始."

[한글 번역] "미치고 망령된 죄는 실로 죽음을 면하기 어려우며, 가짜 학문(僞學)이 전해진 것은 실로 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 해설: 평생을 바쳐 정립한 자신의 철학을 권력 앞에서 스스로 '가짜'라고 부정하며, 학문적 자존심을 완전히 내던진 대목입니다.

 

3. 정신이 혼미하여 저지른 잘못이라 변명함

[원문] "老悖失志, 精神荒惑, 以致家門不肅, 玷汚朝廷."

[한글 번역] "늙고 노망나서 뜻을 잃었고 정신이 거칠고 혼미하여, 집안 단속을 엄히 하지 못하고 조정의 명예를 더럽히기에 이르렀습니다."

  • 해설: 비구니 사건과 며느리 관련 추문에 대해 직접적인 시인은 피하면서도, "정신이 혼미해 집안 단속을 못 했다"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며 상황을 모면하려 했습니다.


🧐 칼럼니스트의 시선: 도덕의 군주인가, 생존의 기술자인가?

 

요약 1: 지행합일(知行合一)의 붕괴

 

주희는 평소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키고(舍生取義), 인욕을 끊어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파멸의 위기에 처하자, 그는 그 어떤 소인배보다도 빠르게 자신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권력자 한탁주 일파에게 굴복했습니다. 이는 그가 강조했던 도덕적 엄숙주의가 타인에게만 적용되는 '위선의 잣대'였음을 시사합니다.

 

요약 2: 역사가 남긴 서늘한 기록

 

이 사죄문은 결국 주희를 죽음에서 구했습니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돌아갔고, 몇 년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이 비굴한 기록은 정사(正史)와 당대 기록에 고스란히 남아, 끊임없이 그의 인간적 결함을 증명하는 꼬리표가 되었습니다.


맺음말

 

우리가 '성인'으로 받드는 인물의 이면에는 이처럼 추악하고 비굴한 인간의 민낯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주희의 '십죄'와 '사죄문'은 도덕을 독점하려는 자가 권력과 욕망 앞에서 얼마나 나약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경고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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